MARIA KIM 김마리아
(1892-1944)
졸업연도: 1928? / 수학 시기: 1927-1928
전공: 사회학
주요 경력
- 정신여학교 교사 (1914)
- 동경여자학원 본과, 고등과 수학 (1915-1919)
-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 (1917)
- 2·8 독립 선언 및 3·1 독립운동 참가 (1919)
- 상해애국부인회 간부 및 의정원 의원 (1919)
- 난징 진링대학교 (金陵大学, 금릉대학) 수학 (1920?)
- 파크 대학교 학사 (1923-1925)
- 시카고대학교 사회복지동아리 회원 (1927)
- 시카고대학교 사회학 석사 (1928?)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결의 위원회 위원 (1927)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이사회 부회장 (1928-1929)
-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 교육행정학 석사 (1929)
- 근화회(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1930)
- 비블리컬 세미너리 (뉴욕) 종교교육학 학사 (1931)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부회장 (1932-1933)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2)
김마리아는 1891년 황해도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김윤방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힘썼고, 그녀의 고모부 서병호와 사촌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삼촌 김필순은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였으며, 종고모 김순애도 남편 김규식과 함께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외에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이렇게 김마리아는 개화 지식인이자 애국지사였던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국애가 싹텄을 것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이 지어주었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이후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4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최초의 여성 종합지 성격을 띤 기관지 여자계(Women's World)를 발간하였다. 이후 이 친목회를 중심으로 황에스더, 나혜석, 차경신 등과 함께 일본내 한국여성 유학생계를 이끌었다. 그녀는 일본에서 귀국길에 기모노의 오비(허리띠)에 2·8독립선언문을 숨겨서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하였다. 2·8 독립운동과 3·1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당하여 평생 건강문제로 고생을 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Korean Patriotic Women’s Association)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로 탈출하였다. 이후 여성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난징 진링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대학교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27년부터 2년간 시카고대학교 사회복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시카고대학교 석사학위 취득에 대한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두산백과사전 등) 과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연구학생으로만 수학했다는 기록 (독립기념관, 한국기독공보, 김마리아선생 기념사업회 등) 두가지 기록이 존재한다. 시카고대학교 재학시절 그녀는 시카고대학교 사회복지클럽 회원,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결의 위원회 위원, 이사회 부회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뉴욕에서 신학 공부를 하며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발히 애국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서울에 체류할 수 없고 신학을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제의 제약이 뒤따랐다. 이후 함경남도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Martha Wilson Memorial Women's Theological Training School)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 전도사업과 신학 교육에 힘썼다.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변절하던 시기에도 그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44년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5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녀의 유언대로 유골은 대동강에 뿌려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녀를 기리는 위패가 봉안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