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 YUM CHO 조희염
(1885-1950)
수학 시기: 1924-1927
전공: 신학, 사회과학
주요 경력
- 핼리팩스 댈하우지대학교 신학사 (1914-1921)
- 토론토 낙스대학교 신학 석사 (1921)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회장 (1925-1927)
- 시카고대학교 국제학생회 회계부장, 회장 (1925-1926)
- Pan-Pacific 컨퍼런스 한국 대표 (1925)
- 시카고대학교 한인학생회 회원 (1926)
- 시카고 YMCA 외국인학생부 부장 (1926)
- 시카고 한인교회 목사 (1926-1927)
- 함흥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 교장 (1927-?)
- 함흥 영생학교 교사 (1927-?)
- 캐나다 장로교 한국선교부
- 함흥 YMCA 총무 및 회장
- 원산 남부교회 설립자 및 목사 (1945?-1950)
- 북한군에 의해 순교 (1950.10)
조희염은 1885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캐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를 거쳐 캐나다로 유학하였다. 캐나다 핼리팩스에 있는 댈하우지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토론토에 있는 낙스대학과 토론토대학에서 수학하며 신학을 전공하였다. 1924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미국 시카고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귀국할 때까지 활발히 학생활과 목회활동에 참여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회장(1925-1927), 시카고대학교 국제학생회 회계부장 (1925) · 회장 (1926), 시카고대학교 한인학생회 회원, 시카고 YMCA 외국인학생부 부장 (1926) 등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학생활동에 임했다. Pan-Pacific 컨퍼런스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우라키에 학술논문을 게재하는 등 학업활동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특히 Pan-Pacific 컨퍼런스에서 일본대표와 설전을 벌여 컨퍼런스가 조기 폐회되었던 일화는 데일리 마룬 (The Daily Maroon) 에 이틀간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조희염은 신학자이자 목회자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YMCA 포럼 및 펠로우십 미팅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여 발표를 하기도 하고, 시카고 한인교회 목사로도 재임하였다.
조희염은 박사학위 도중 학위를 끝마치지 못하고 캐나다 선교부로부터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신학교육에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받고 1927년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조희염은 함흥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 교수, 영생학교 교사로 재직하였고, 함흥 YMCA 총무 및 회장 또한 겸하였다. 1930년 독일에서 개최된 세계면려청년대회 (World Christian Endeavour Convention) 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식민지 하의 한국 사정을 소개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간청하였으며, 귀국 이후 유럽과 러시아 여행기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8년 송창근, 김관식, 함태영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 (현 한신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40년대 원산 남부교회를 세워 목사직을 수행하였고, 해방 직후 원산 부시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갈리면서 잠시 서울로 피신했던 조희염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치 참여를 제안 받았으나 북한의 교회를 지키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보고 거절한 후 원산으로 돌아가 남부교회에서 목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국군의 원산 입성이 다가오자 원산형무소 뒷산에서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전쟁으로 월남한 신도들은 조희염 목사의 미션과 원산 남부교회의 뿌리를 살려 서울 창신동에 남부교회를 설립하였고, 2018년 ‘순교자 조희염 목사 기념예배 및 제막식’이 남부교회 예배당에서 열려 조희염 목사의 순교를 기렸다.